오!프로젝트 ①여기, 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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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울혁신센터로 메일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서울혁신파크의 열린 녹지를 관찰하며 만든 생태지도를 배포할 장소를 찾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30종의 풀이 그려진 ‘생태지도’가 첨부돼 있었죠. ‘뭐지? 이 귀여운 프로젝트는?’하며 스윽 훑어보는데, 내용을 천천히 들여다볼수록 마음 한편이 조금 무거워지더라고요. 작가는 생태지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서울혁신파크 정문 반대편에 있는 ‘열린 녹지’를 2020년의 여름 동안 관찰하였습니다. 포장도로가 아닌 흙길이 약 140m 이어지는 구간에서 자생적으로 사는 50종 이상의 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풀을 살피는 시간 동안 다양한 생물군도 함께 관찰할 수 있었고, 풀이 지탱하는 작은 생태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기 풀이 있을 지도>는 도심의 작은 공원에 사는 풀을 소개하고 기록하는 한 장의 생태 기록 결과물이며,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베어지기를 반복했던 식물군인 ‘풀’에 대해 알아가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여기 풀이 있을 지도, 안난초

늘 걷던 산책길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풀이 자생하고 있었다니,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가까이 있는 존재에 대한 무심함. 이건 제 최대 콤플렉스거든요. 작은 것에 애정을 갖고 그 의미를 세심하게 기록한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궁금했습니다. 인터뷰는 부슬부슬 비 내리는 봄날, 청년청 2층에 자리한 난초 님의 작업실에서 이뤄졌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초록의 작은 화분들에 둘러싸여서요.

서울혁신파크 '열린 녹지' 30종의 여름 풀을 기록한 <여기 풀이 있을 지도>

길 위의 작은 풀을 바라봐 주길 바라는 마음

<여기 풀이 있을 지도>를 보고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이런 작업을 시작하신 계기부터 여쭤봐도 될까요?

집이 서울혁신파크 근처라서 전부터 이 길을 많이 지나다녔어요. 청년청에는 2020년 5월에 입주했고요. 내가 다니는 길 위의 식물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2020 서울도시재생 열린공모 : 청년에게, 도시 서울을 묻는다> 공고를 보고 지원했죠. 이 공모가 일종의 ‘마감’ 역할도 해준 셈이에요.

도시재생과 <여기 풀이 있을 지도>의 작업이 어떤 의미로 이어지는지 궁금해요.

코로나 19가 시작되는 해에 공모 사업의 개요를 살펴봤는데, 자연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도시 사람에게 이 콘텐츠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코로나 19도 자연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지에서 비롯됐잖아요. 공모사업의 성과 공유회 때 들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는데요. “이 사업에 참여한 청년들은 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애정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다.”라는 말이었어요. 사실 요즘, 청년이 거주 지역에 애정을 갖기가 쉽지 않잖아요. 서울에서 아이를 낳고 살거나 집을 사지 않는 이상 떠돌이 같은 생활을 반복하니까요. <여기 풀이 있을 지도>가 그런 도시 청년들에게 주변을 둘러싼 크고 작은 풀을 관찰하고 주변을 탐색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식물생활>이란 책도 내셨죠. 식물은 작가님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그림책 전공을 위해 대학원에 갔어요. 당시엔 제가 무엇을 그려야 할지 잘 몰랐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이 허무하게 흘렀죠. 마침 대학원 캠퍼스에 식물이 매우 많은 편이었는데, 산책을 하며 몇 번이고 그걸 계속 들여다보게 됐어요. 제게 그 기억이 정말 좋게 남았어요. 이후로 식물은 제게 계속 공부하고 싶은 대상이 됐죠. 사실, 자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7년 전쯤 제주 곶자왈에 갔을 때 처음 받았어요. 마치 제가 자연의 허락 없이 그곳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거든요. 덜컥 겁도 나더라고요. 자연이 나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처음 받았어요. 도시에 살면 그런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잖아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연이 주는 생경함이었던 거죠.

<여기 풀이 있을 지도>의 안난초 작가님 🙂

떠밀리는 흙과 풀의 자리

<여기 풀이 있을 지도>를 보면서, 문득 작업 과정이 궁금했어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여름 풀 지도’라는 부제처럼 6월부터 9월까지 식물을 관찰했고, 9월부터 11월 사이에 스케치해서 완성했어요. (원래 풀에 대한 지식이 많은 편이셨나요?) 남들 다 아는 강아지풀이나 닭의장풀 정도만 알았지, 다양하게 알진 못했어요. 그래서 자료를 많이 찾아봤죠. 두꺼운 풀 도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넘겨봐야 정확한 풀이름을 찾을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사초 분류 도감에는 148종이 기재되어 있고 형질(생긴 모양, 특징)로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사초들은 풀밭에 섞여 자라기 때문에 구분이 더 어렵죠.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업하면서 멘붕이 왔어요.

식물에 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으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네, 전혀요. 식물 개체를 일러스트로 그리는 작업을 한 적은 있어도, 이런 지도 작업은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재밌게 작업해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계획이에요. 달걀책방이라는 서점에서 관련 전시와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궁동산이라는 작은 산의 생태지도도 만들게 됐어요. (작업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풀 이름을 알게 되면 같은 길이라도 그 장소가 다르게 기억되곤 해요. 아무래도 눈이 한 번씩 더 가니까요. 무엇보다 좋아하는 대상을 알아가면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았어요. 그것도 지원금을 받으면서요.

작은 화분과 귀여운 일러스트 그림이 가득한 안난초 작가 님의 개인 작업실 풍경

제가 보기엔 굉장히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에요. 이런 작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난초 님만의 동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배우 윤여정 님이 하신 말씀 중에 “나는 눈앞에 있는 것만 해결하면서 산다, 계속해서 일을 이어가고자 하는 그 끈을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요즘엔 제가 일하는 가장 큰 동력이 돼요. 사실 남들이 얘기하는 성공이 저와는 많이 떨어져 있거든요. 지속적인 수입도 부족하고요. 그런데 하나의 일을 마감하고 나면 제게 오는 반응들이 있어요. <여기 풀이 있을 지도>도 저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주는 주춧돌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멀리 보지 않고 눈앞에 있는 것을 우선 해결하는 것’! 그게 저의 동력인 것 같아요.

눈앞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기회는 스스로 만드신 거죠.

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 같아요. 저는 일을 직접 벌이고 마무리 짓는 게 맞는 스타일이에요. 직장을 다니며 디자이너로 일한 적도 있지만, 결국 제 작업이 하고 싶어서 다시 나왔거든요. (부지런하고 추진력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나요?) 바깥에서 보기엔 그렇게 느끼실 수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 거예요. (마감 기간이 닥쳐야 하시는 스타일이신가요?) 네, 맞아요. (조금… 위로가 되네요.)

<여기 풀이 있을 지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세요?

<여기 풀이 있을 지도>라는 이름이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 이런 풀이 있으니 한 번 주목해 달라’는 거죠. 사람들은 보통 자연을 볼 때 풀보다는 나무에 집중해요. 하지만 나무를 아는 것만큼 풀도 정말 중요하죠. 특히 작은 생물이 살아가는 생태계에서는요. 우리나라는 시간이 지나면 녹지가 자연스럽게 숲이 되는 환경이라고 해요. 초지 형성이 어려운 거죠. 가뜩이나 풀이 적을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도시화로 풀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어요.

여기 혁신파크도 1960년 질병관리본부 시절부터 사람들이 계속 특정 용도로 사용해 왔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밟고 있는 보도 블럭 밑에는 여전히 흙이 있어요. 원래 이곳의 주인은 이런 흙과 풀들이 아니었을까. 그걸 잊은 채 사람들 편의에 의해 도시가 운영돼 온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작업했어요.

"나는 식물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찾아가는 사람"

"지도를 들고 열린 녹지 위에 서는 것! 그게 첫 번째 할 일이에요!"

앞으로 작업도 기대 되는데요. ‘식물’이라는 소재에 계속 집중하실 계획인가요?

작가는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사람인데, 저는 식물을 통해 그걸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식물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부터 ‘그리는 소재’에 대한 고민은 더 하지 않게 됐어요.

<여기 풀이 있을 지도>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풀이 있나요?

음… 질경이요? 질경이는 스트레스에 강한 아이예요. 다른 풀이랑 같은 구역에서 자라면서 경쟁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잎이 밟히고 찢기더라도 길가에 혼자 나와 사는 아이죠. 그런 스트레스에 강한 거예요. 지도에 나온 흙길이 실제론 아주 짧지만, 각각의 풀들이 자기 구역에서만 살아가요. 식물마다 자기가 이겨낼 수 있는 스트레스의 종류가 다 다른 거죠.

마지막으로 <여기 풀이 있을 지도>를 손에 쥔 분들에게 사용법을 알려주세요.

지도를 들고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풀을 찾는 거죠. 사실 그게 전부예요! 지도를 들고 열린 녹지 위에 서는 것! 그게 첫 번째 할 일이에요!


* <여기 풀이 있을 지도>필요하신 분은, 평일 11~17시 사이

서울혁신파크 상상청 1층 <비건카페 달냥>을 방문해주세요. *평일 11시~17시

상상청 1층 비건카페 달냥으로 오시면 <여기 풀이 있을 지도>를 GET! 하실 수 있어요!

글, 사진 ㅣ 서울혁신센터 사업개발팀 나무, 스누피

*‘오!프로젝트’는 서울혁신파크 230여 혁신그룹들의 프로젝트를 찾아 소개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에스엔에스, 벽에 붙은 포스터, 나뒹구는 리플렛, 귀동냥 등을 통해 알게 된 혁신그룹의 다양한 사업, 프로젝트, 콘텐츠들 가운데 지나칠 수 없는 가치 있는 프로젝트를 찾아 기록합니다.